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밥 딜런 (문단 편집) == 여담 == * 2021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밥 딜런 센터와 아카이브가 세워진다. 딜런의 작곡/작사 노트, 노래 초안, 음반, 사진, 영화 아웃테이크, 공연 기록 등으로 구성된 10만개가 넘는 자료를 보관한 딜런의 아카이브는 오클라호마 털사에 세워질 예정이다. ‘BOK Financial Corporation’의 회장인 재벌 조지 카이저는 딜런의 관한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딜런에게 약 2,000만 달러를 주고 그의 관련된 거의 모든 물품들을 사들여서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2017년 조지 카이저 패밀리 재단은 털사 예술 지구에 있는 밥 딜런 센터를 위한 디자인 공모전을 발표했다. 이 재단은 2018년 ‘Olson Kundig Architects’에서 건축가를 선정해 건물을 설계했다고 발표했고 2021년에 문을 열 예정이며 딜런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밥 딜런 팬들을 위한 [[메카]]’라고 평했다.[* [[https://www.washingtonpost.com/lifestyle/style/a-billionaires-quirky-quest-to-create-a-mecca-for-bob-dylan-fans-in-tulsa-oklahoma/2017/10/11/6e7f4754-93f9-11e7-89fa-bb822a46da5b_story.html|#]]] * 2018년 나온 간단한 계획안 * [[파일:44D94E30-80F4-4989-985F-0103A296928A.png|width=450]] * [[파일:29BFFD92-312D-4A7F-BCA4-82DB46ADB35B.png|width=450]] * [[파일:F50F2052-4084-429F-9C32-25F3EABCE051.png|width=450]] * 엄청난 [[워커홀릭]]이다. 1962년 앨범 발매 이후 최소 2~3년안에 무조건 앨범을 냈다. 이렇게 앨범을 자주 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작품의 퀄리티를 계속 유지했다. 가장 오래된 공백기는 2001년 'Love and Theft' 발매 후 5년만에 'Modern Times' 앨범을 낸것이다. 2015년, 2016년, 2017년엔 3년 연속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또 1988년부터 2018년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의 이름은 ‘Never Ending Tour’. * 워낙 명곡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커버한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많이 커버 된 아티스트 중의 한 명이다.[* [[https://www.whosampled.com/most-covered-artists/|역대 10위]]] * [[스티브 잡스]]가 가장 존경한 인물중의 한명이다.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말했다.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영화 ‘[[스티브 잡스(영화)|스티브 잡스]]’의 [[대니 보일]] 감독은 “그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반골로 부르며 우상화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딜런이 잡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애플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잭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애플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1984년 매킨토시를 공식 발표할 때 스티브 잡스는 연설 첫머리에 딜런의 ‘세상이 변하고 있네(The Times They Are a-Changin’)’ 중 둘째 행을 인용했다. * [[힙합 음악|힙합]]을 좋아하는듯 하며 [[퍼블릭 에너미(힙합 그룹)|퍼블릭 에너미]]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본인이 진행했던 라디오에서 [[LL 쿨 J]]의 ‘Momma Said Knock You Out’을 틀기도 했다. LL 쿨 J는 딜런이 본인의 노래를 틀었다고 들었을때 너무 좋아 흥분했다고 한다. * 대중 음악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잘 모르지만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이디. 빌보드가 2015년 발표한 올타임 앨범 아티스트 랭킹에서 2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 2021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밥 딜런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3억 2500만 달러로, 역대 뮤지션 중에서 4위로 [[https://www.forbes.com/sites/arielshapiro/2021/06/07/rights-to-rodgers-hammerstein-worth-staggering-sum-more-than-bob-dylan-or-paul-simon-beatles-michael-jackson/|조사]]되었다. * 1960년대 당시 인터뷰, 기사들 >시카고 데일리 뉴스: 당신은 이른바 포크록 음악을 부를 생각이 있나요? >밥 딜런: 아니요, 그건 포크록이 아닙니다. 그냥 악기들이요... 나는 그걸 기계 음향이라고 불러요. 뭐랄까 독립음악 같은 거죠. 정말이지 설명을 못 하겠는데... 나는 열세 살인가 열네 살때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로큰롤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때 그만두고 말았죠. 그냥 그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 >시: 포크 사운드는 왜 그만뒀습니까? > >밥: 그것만 줄창 하기에는 여기저기 너무 많이 가본 거죠. 진정한 포크는 절대로 42번가를 보지 않죠. 비행기를 타는 법이 없어요. > >시: 마치 사람들로부터 끔찍하게 유리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밥: 어떤 압력 때문에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습관이죠. 내가 원래 그런 식이에요.. 모르겠어요, 연결되는 것보다 단절되는게 더 쉬운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엄청나게 존경해요.. 관련이 너무 많았죠, 상황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아서, 자신을 깨트리는 것보다는 그냥 관련되지 않았죠.. > >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걸 피하시나요? > >밥: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요. 나 같은, 역시 단절된 사람들이요. 단절된 사람들이 많죠. 나는 소외되었다거나 단절되었다거나 두렵다는 느낌이 없어요. 단절된 사람들 간의 어떤 종류의 조직화는 별로예요. 나는 그냥 어떤 조직과도 함께 갈 수 없어요. 언젠가는 어떤 지하철에서 자선이 완전히 혼자 있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르죠. 전기도 나가서, 오도가도 못 하고, 40명의 사람과 함께. 그러면 저는 그들을 알아야 했죠. 그때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할 거예요. >---- >― 1965년 11월, 시카고 데일리 뉴스 >내가 그의 셋째 음반을 건네고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자기 사진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리고 서명했다. 나는 그에게 블루스를 정의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바지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찢어진 바지라고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블루스(blues)는 색이에요. 그게 다에요.” 그리고 나는 “미국 포크 음악에서 본인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포크 가수면 개나 소나 포크 가수일걸요.”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가 그들 자신의 지도자를 발견할까요?” 그는 약간 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새 세대를 믿어요. 곧 새 세대가 내게 맞서 반항할겁니다. 내가 더 예전 세대에 반항했듯이요. 변화만큼 안정적인 건 없지요. 나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 >― 데일리 헬럴드, 스튜어트 크럼프[* 크럼프는 “인터뷰라기보단 익살극 같네요.”라고 인터뷰를 평했다.] >딜런은 그가 자신을 의식하는 동안 모든 이가 자신을 의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탬버린 맨을 들을 수 있는 그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야심의 핵을 건드렸습니다. 오크와 팩스턴과 팀 하딘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에너지를 느끼고 에너지를 전달받았습니다. 일부, 엔더슨교 블루와 나머지, 리처나 파리나 같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영웅이었고 마지막 위대한 소포모어인 폴 사이먼은 딜런에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 >― 마이클 토머스, 1968년 8월 >KQED 방송국: 자신이 기본적으로 가수라 생각합니까, 시인이라 생각합니까? > >밥 딜런: 아 나는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는 남자라고 생각해요. > >K: 당신의 개인적 미래 희망은 뭐고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 >밥: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고 그냥 갈아 신을 장화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3일 >KQED: 포크 가수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늘날 저항 가수들로 규정 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밥 딜런: 이해가 안 가는데요. 다시 질문해주시겠습니까? > >K: 당신과 동일한 음악적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저항 가수인 사람들이 얼마나 되나요?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날 사는 사회적 상태에 관해 저항하는 데 음악을 이용하나요? > >밥: 얼마나 많냐고요? 약 136명이요 (웃음) 136명이나 아니면 132명이요. > >K: 저항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 >밥: 노래하고 싶지 않을 때 노래를 한다는 뜻이지요. 노래하고 싶은 희망을 거스르며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 >K: 저항가요를 부르시나요? > >밥: 아니요. > >K: 무슨 노래를 부르시나요? > >밥: 모든 사랑 노래요. > >K: 개명을 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다른 이름은 뭔가요? > >밥: 쿠네제비치요. 친척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여 콘서트 표 같은걸 달라고 할까 봐 바꿨어요. > >K: 밥, 오늘날 가수들은 왜 그렇게 마약을 널리 이용할까요? > >밥: 몰라요. 당신은 가수인가요? > >Q: 밥,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주법을 사용하시나요, 아니면 기법이라고 부르나요? > >밥: 음, 그냥 앉아서 정신 차려보면 곡이 나왔어요. > >Q: 당신은 왜 우리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면을 썼나요? > >밥: 나는 그냥 당신 질문에 수준에 맞취 답변하고 있을 뿐인데요. > >Q: 틀림없이 천 번은 들으셨을 질문인데요.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시나요? 저는 노래 한 곡이 이해가 안 가는데요. > >밥: 음, 기분 나뻐하거나 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아요. 못 알아들었다면, 정말이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니니까. > >Q: 글을 쓸 때 뭔가를 말하려고 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즐기시나요? > >밥: 나는 그냥 엔터테이너예요. 그게 다에요. > >Q: 당신은 글을 쓰고 노래하는게 자신에게 진정 중요하다고 느끼시나요? > >밥: 당신 때문에 화가 날 것 같은데요. > >Q: 아니면 그냥 잘되어가기 때문에 하고 싶은건가요? 당신이 쓰는 것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느끼나요? > >밥: 느낄게 뭐가 있는데요? 몇 개만 대봐요. > >Q: 기본적 감정들이요. 고통, 후회, 사랑... > >밥: 나는 그런 감정이 없는데요. > >Q: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 >밥: 나는 내 느낌들을 설명할 필요 없어요! 여기 재판정이 아니에요! >----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플레이보이]]: 왜 저항가요를 작곡하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셨나요? > >밥 딜런: 메시지가 있는 노래들은 다들 알겠지만, 지겨워요. 내가 하려는 건 시청을 세내서 약 50명의 웨스트 유니온[* 금융, 통신회사.] 사람들을 데려오는거에요. 내 말은 그러면 진짜 메시지가 있을 수 있겠죠. > >플: 작년에 한 인터뷰어에게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게 사실이라면 더 기대할게 남아 있나요? > >밥: 구원이요. 그낭 순전한 구원이요. > >플: 소년 시절 꿈의 정석인, 커서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나요? > >밥: 아니요. 어렸을때는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었어요. 누가 트루먼이 되고 싶겠어요? > >플: 음,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칩시다. 첫 1,000일 동안 무슨 성과를 달성하고 싶나요. > >밥: 맨 처음 할 일은 아마도 백악관을 옮겨야죠. 나는 즉시 미국 국가를 새로 쓸 거고, 어린 학생들은 ‘아름다운 미국’을 암기하는 대신 ‘Desolation Row’를 외워야 할겁니다. 그리고 나는 [[마오쩌둥]]에게 당장 승부를 걸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싸우겠어요. >---- >― 플레이보이, 1965년 * 알다시피 가사 쓰는 실력을 보면 과연 보통이 아니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촌철살인]]적인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 다만 말 솜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사석에서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 또한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런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 한국에서는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늘 불편해 하여 음악 스타일, 대외적인 이미지를 몇년 단위로 바꾸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대 시국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하지 않고 (그를 접한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앞 뒤 연결이 힘들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는 등[* 처음으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즈음엔 언론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 사진이 잘 나오는 지 신경을 쓰는가 하면, 후술할 첫 일렉트릭 콘서트에서 청중들과 거의 싸울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나 공연이 끝나니 관객 수가 몇명인지 묻는 등. 또한 부랑자를 연상케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섬을 몇 개씩이나 보유한 부동산 부자다.] 대중과 언론의 기대를 아랑곳 않는 행보를 보여왔던 탓에 영미권에서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전술한 것 못지 않게 강하다. * [[신비주의]] 이미지도 강하다. 밥 딜런 본인이 언론을 굉장히 싫어하며 인터뷰도 거의 하지않는다. 시상식이나 공연을 제외하면 대중 매체에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또 그는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공공 장소에서는 종종 후드를 쓰거나 금발 가발을 쓴다. * [[복싱]]팬이고 실제로 복싱을 배웠다.[[https://www.needsomefun.net/wp-content/uploads/2016/01/bob-dylan-box.png|사진]] 개인 체육관도 가지고 있다. 딜런에게 복싱을 가르쳐준 복싱 선수 레이 맨시니는 “밥은 자신만의 개인 체육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본 체육관 중 최고야.”라고 말했다. 또 [[무하마드 알리]]의 팬이었고 그와 만난적이 있다. 1975년 12월, 딜런이 감독한 영화가 개봉된 후, 알리는 루빈 카터의 부인과 딸과 함께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있는 딜런의 콘서트 롤링 썬더 리뷰에 출연하였다. 알리는 모금 콘서트에서 MSG 무대에서 카터에게 전화를 했고, 투어 초반에 감옥에 있는 카터를 방문했다. 딜런과 알리는 자선 콘서트에서 무대 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https://www.needsomefun.net/wp-content/uploads/2016/06/1-The-Night-of-the-Hurricane-benefit-concert-on-December-8-1975-at-Madison-Square-Garden-where-Muhammad-Ali-visited-Bob-Dylan-backstage-and-gave-him-a-gift-a-huge-boxing-glove.-Ken-Regan..jpg|사진1]], [[https://i.pinimg.com/originals/16/5c/da/165cdacbd594ee1f2d627a0fad3bc0f5.jpg|사진2]] 알리가 사망하고 딜런은 “위대함의 척도는 지구 상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가장 위대했다. 모든 면에서 그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친절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라고 그의 홈페이지에 글을 쓰며 그를 추모했다. [[매니 파퀴아오]]와도 만난적이 있다. 파키아오의 대변인 프레드 스턴버그는 “그는 미리 전화를 걸어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지금까지 우리 체육관에서 이런 분위기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나는 거의 10년 동안 그 체육관에 다녔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https://www.needsomefun.net/wp-content/uploads/2016/01/Bob-Dylan-visits-Manny-Pacquiao.jpg|사진]] 또 옥중에서 자신을 무죄를 호소하는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에 대한 곡을 쓰기도 했다. 딜런은 형무소로 가 카터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 딜런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 외적인 이미지와 행동 양식 면에서도 동시대 및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썬글래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물고 늘 티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방진 이미지와 수수께끼 같고 냉소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쿨'''한 락뮤지션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어낸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역대 록 뮤지션들 중에 섹시한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 스타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지적인'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그래서 밥 딜런은 록의 두뇌라는 비유도 있다. 또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밥 딜런의 이미지를 모방하며 이미지 스타일과 언행방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이 꽤 유명하다. * 역사적으로 그는 그가 녹음한 스튜디오 밴드 멤버들과 친해지거나 대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음악가들은 보통 그 당시 프로듀서로부터 지시만 기다리곤 했고, 종종 딜런의 냉담한 행동과 녹음 후 받은 신용 부족으로 인해 좌지우지되었다. 최근에 딜런이 80년대와 90년대에 모은 투어 밴드와 함께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고 녹음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다소 변했다고 한다. * 그에게는 의붓딸 마리아의 손자 네 명, 제시와 사무엘의 손자 한 명, 그리고 야콥 딜런의 손자 세 명이 있다. 그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할아버지" 범퍼 스티커를 가지고 있는데, 이 스티커는 그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차에 전시하고 있다. * 그는 라이브로 연주할 때 더 이상 기타를 연주하지 않고 대신 키보드로 연주하거나 하모니카로만 연주한다. 비록 이것이 허리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분명 그 밴드의 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이다. 그의 공백을 메우는 그의 오랜 투어 밴드에 재능 있는 기타리스트 몇 명을 모았다. *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커버에도 등장한다.[[http://2.bp.blogspot.com/_I38CEB3Ub2c/SWekeUnj36I/AAAAAAAADQo/wHEOaGuk5dM/s320/sgt-pepper_bob_dylan.jpg|보기]] *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과 관계가 있을 정도로 패션과 스타일이 유명했지만, 2015년 20대 [[경관]]에게 '''노숙자''' 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 90년대 번역 출판된 소설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어 소설을 보면 밥 딜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이름이 ''보브 딜런''으로 표기되어있다. 밥 딜런을 일본어 [[가타가나]]로 풀어쓴 걸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이 번역은 사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200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지금의 ''밥 딜런''으로 고쳐졌다. 다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2001년 이후에도 여전히 보브 딜런으로 쓰는 사람도 꽤 있다. * 90년대 초반에는 [[Apple|애플]] 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 외국에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동급의 본좌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번안된 "Blowin' In The Wind"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 가창력 자체보다는 웅얼웅얼 읊조리며 부르는 독특한 분위기의 창법이 유명하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If Not For You'나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를 들어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2012년작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했다. 참고로 이것들은 노래와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목소리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미성의 소유자이며, [[Nashville Skyline]]에 나오는 목소리가 진짜 목소리에 가깝다고 한다. * 2010년 3월 31일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열었다. 그리고 8년만인 2018년 7월 27일 다시 재내한했다. * [[원피스(만화)|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도 쓰였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 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컵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밴드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의 리더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1996년 앨범 Bringing down the horse, 그리고 이 앨범 최고의 히트곡 One Headlight는 상당히 유명하고 1998년 Time Out Of Mind로 아버지 밥 딜런이 그래미 앨범상을 받을 때 월플라워스 역시 락부문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앨범부터는 그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활동은 중단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중.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부자 간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손자인 파블로 딜런은 래퍼로 활동 중인데, 할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리 철저하게 언더 활동 중이라 정보가 매우 부족한 편. * [[2013년]] 11월 13일 "[[http://www.bobdylan.com/sites/bdylan/files/imagecache/470xscale/image004.jpg|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이 국내 정식 발매되었다. LP 미니어쳐로 제작된 정규 47개의 앨범들, 268쪽의 부클릿등 딜런의 음악을 귀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구입해보도록 하자. * [[http://i1006.photobucket.com/albums/af189/sightless_/Cover/BobDylan-ChristmasintheHeart.jpg|크리스마스 앨범]]도 냈다. [[http://www.mardecortesbaja.com/BettyPageChristmas.jpg|개봉 사진]]이 은근 수위가 높다. * 배우로도 아주 가끔씩 활동한 적이 있는 데,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이 있다. 비중있는 조역인데 연기는 그닥 좋지 않았다. 감독 영화도 있는데 망했고. 10여년 이후 영화가 재발굴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Hearts of Fire이 혹평을 들은 이후로는 영 아니다 싶었는지 출연은 없다. 장난삼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로써 데뷔를 한 건 의외로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그것도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1963년에 BBC에서 만든 단편 [[영드]] 'Madhouse on Castle Street'에서였다. *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존 포드]]와 [[찰리 채플린]]이다. >"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 [[http://www.daysofthecrazy-wild.com/video-ten-films-that-had-a-big-impact-on-bob-dylan/|#출처 기사]] / [[http://news.joins.com/article/20756256|#중앙일보 번역 기사]]] * [[허영만]]의 1987년 작품 <고독한 기타맨>에도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강토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이강토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강토의 기타 실력에 빠져서 그의 멘토이자 프로듀서로 나선다. 이강토는 밥 딜런의 도움에 힘입어 전미를 석권한다. 실제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계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기축이 되었던 존재였다. 한국 포크록의 전설인 [[한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많이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게 "행복의 나라"였다. 실제 그가 말하길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씨앗을 뿌렸다'''라고 평한다. * 2007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인 아임 낫 데어가 제작되었다. 감독은 [[토드 헤인스]], [[리처드 기어]], [[크리스천 베일]], [[히스 레저]], [[케이트 블란쳇]], [[벤 위쇼]], 마커스 칼 프랭클린 6명의 배우가 각각 밥 딜런의 다른 모습을 연기하였다. * 60~70년대 많은 유명곡을 뽑아내던 활동시절과 현재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성향도 그렇고. 1980년대 이후 앨범들은 한국에서 그다지 잘 알려있지 않기 때문에 2010년 내한공연 때 예전 생각하고 보러 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에 목소리가 안 좋아진 것은 아니고 1980년 이후로 갑자기 창법을 바꾸었는데 1986년 'Oh Mercy'이후로 창법을 완전 갈아 엎은 것으로 보고 있다. * 2013년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모욕 및 혐오선동 건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2012년 [[롤링 스톤]] 프랑스어판 인터뷰에서 '흑인들은 아직도 일부 백인들이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노예 주인이나 [[쿠 클럭스 클랜|KKK]]의 피를 갖고 있다면 흑인들이 알 수 있다는데 마치 유대인이 나치의 피를,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의 피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우스타샤]] 문서 참조.] 부디 하루빨리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여 크로아티아를 나치에 비유했다는 이유. 정치적인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보내길 꺼려서 [[오프 더 레코드]]를 걸은 건데 그걸 어기고 기사에 실은데다가 그 발언조차도 특정 국가를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 2021년 8월 13일 과거에 12세 소녀를 [[그루밍]] [[성폭력]]했다는 주장이 나와서 뉴욕주 연방 법원에 소송이 걸린 상태이다.[[https://m.yna.co.kr/view/AKR20210817046800009?section=international/all|#]] 자신을 'JC'라고 밝힌 피해 여성의 주장에 따르면 1965년 4월부터 6주간 뉴욕 첼시 호텔에서 딜런이 술과 약물을 사용해서 자신에게 몰래 성폭력을 가했고, 유명 음악가의 지위를 이용해서 그것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고소 여성이 주장하는 65년 4월부터 6월까지 밥 딜런은 투어로 인해 [[영국]]에 체류중이었던데다, 여러 동료 뮤지션들은 물론이고 [[다큐멘터리]] 'Don't Look Back' 촬영팀까지 동행하고 있었기에 남들 몰래 6주간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며 무고를 주장하는 의견도 있고, 오래 전 일이고 피해자가 어렸을 적 일이니 자잘한 기억의 오류가 있지만 성폭력 혐의는 여전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 밥 딜런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대응했다. 2022년 이 소송은 피해자측이 소송을 영구히 철회해 종결됐다. 이 소식은 딜런의 변호사들이 J.C.가 법원이 명령한 기한까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넘기지 못하자 증거를 인멸했다고 고발한 직후에 나왔다. 딜런의 변호사 측은 "우리는 원고가 변호사가 주도하는 이 가짜 사건을 취하하고 이 사건이 기각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https://pitchfork.com/news/bob-dylan-lawsuit-over-alleged-1965-sexual-abuse-of-minor-dropped/|#]] * 밥 딜런의 골수팬이라면 밥 딜런하면 떠오르는 것중 하나가 바로 해적판 앨범이다. 자세한 사항은 부틀렉 시리즈 항목 참조. * 2022년, 고등학생 때 썼던 [[러브레터]]가 [[경매]]에서 66만 9875달러(약 9억원)에 팔려서 화제가 되었다.[[https://www.news1.kr/articles/?4871181|국내 기사]] * 2023년 [[티모시 샬라메]] 주연으로 전기영화가 제작된다. 감독은 [[제임스 맨골드]]. * [[미셸 파이퍼]] 주연의 영화 '위험한 아이들'(1995) 에서는 밥 딜런의 시가 주요 소재로 쓰인다. 문제아 아이들이 밥 딜런의 시를 읽고는 시에 관한 매력을 알아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